치과계소식

[치과와 매드 덴티스트] 100년 전 세상을 들썩이게 한 '미친 치과의사들'

작성자정보통신위원회 등록일2021-10-30 조회3409

충격과 공포의 할로윈 특집

10월 31일은 할로윈(Halloween) 축제가 펼쳐지는 날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귀신이나 괴물 등 다양한 캐릭터로 분장해 거리를 누비거나 각지에서 들은 괴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치과계에도 2가지 재미있고도 소름 돋는 괴담이 있어 가져왔다. 각각 미국과 호주에서 벌어진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니 ‘매드 덴티스트’에 관한 이야기다. 두 사례는 엽기적인 행각 자체로써만 아닌 치과의사가 지녀야 할 윤리의 중요성에서도 경종을 울린다.

① Henry and Maria Kinder (출처: Sydney Morning Herald)
② Painless Parker의 이빨 목걸이 (출처: Smithsonian)
③ Painless Parker의 치과 광고 (출처: Smithsonian)
④ Henry Louis Bertland (출처: My Hills Dentist)
⑤ Henry Kinder 살인사건 판결 관련 문서(출처: Dictionary of Sydney)
​​​​​​​⑥ 법적 이름을 Painless로 변경했을 당시 사진(출처: Smithsonian)

코카인 쓰며 발치한 치과의사 “Painless”
1900년대 미국에는 악명 높은 동시에 인기도 높은 치과의사가 있었다. 에드가 랜돌프 “페인리스” 파커(Edgar Randolph “Painless” Parker)는 1892년 필라델피아 치과대학(현 현재 Temple University Maurice H. Kornberg 치과대학)을 졸업한 뒤 개원의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형편없는 실력으로 겨우 졸업했으며 환자를 모으기 또한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커의 선택은 윤리의식을 길바닥에 갖다 버리고 공격적인 광고 마케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이디어와 실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도 파격적이었다. 치과에 찾아온 환자를 대상으로 물에 희석한 코카인 용액을 주사한 뒤 치아를 뽑아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파커는 환자에게 “이 방법이면 50센트를 내는 것만으로 고통이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발치하는 데 5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 달랬다. 때때로 그는 환자들에게 위스키 한 잔을 주기까지 했다.

파커는 훈련된 의사 부족 그리고 통증에 관한 환자의 두려움이 팽배한 당대의 분위기를 활용해 더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치과를 키워나갔다. 하루에 치아 357개씩을 뽑으면서 치아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다닌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윽고 1913년에는 전국을 순회하는 치과 서커스까지 창설했다. 그는 치과 서커스에서 자신의 발치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며 곡예사 및 춤추는 여성과 함께 환자를 앉힌 뒤 코카인 용액를 들이붓고 발치를 감행했다. 시끄러운 밴드의 음악 소리 덕에 환자의 신음을 들은 관객은 아무도 없었으며 불행한 환자를 제외한 모두가 “페인리스”의 치과 치료는 조금도 아프지 않다고 믿었다.

1915년에 들어서는 정식으로 이름을 ‘페인리스 파커’라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페인리스는 미국 서부 해안에 약 30개의 치과 체인점을 열었으며 치과 체인점을 공개적으로 광고하고 개설한 최초의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파커가 졸업한 치과대학의 현 학장인 Dr. 아미드 이스마일은 “파커가 치의학 분야에 남긴 가장 확실한 유산은 그의 나쁜 행동, 사기행각, 끊임없는 이윤 추구를 통해 치과계의 윤리 발전에 기여한 점”이라고 돌아봤다.

‘정직한 치과의사’ 이면의 악성 범죄
호주에서는 1860년대 시드니에서 성공하고 사랑받던 치과의사가 저지른 범죄 이야기가 괴담으로 남아 있다. 헨리 루이스 버틀랜드(Henry Louis Bertrand)가 그 주인공이다.

버틀랜드는 매우 활동적인 치과의사였다. 그는 아내 및 두 자녀와 함께 살며 정직한 시민으로서도 인지도를 높였다.

1864년 말에서 1865년 초의 어느 날, 그러나 버틀랜드는 마리아 엘렌 킨더라는 이름의 환자와 마주했고 어느새 둘은 서로에게 반해 불륜을 시작했다. 엘렌 또한 결혼한 남편이 있었다. 그의 남편 헨리 킨더는 채권자들을 피해 가족과 같이 도시로 옮겨왔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버틀랜드와 엘렌은 헨리 킨더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버틀랜드는 헨리 킨더를 살해하기 위한 무기를 얻고자 조수를 고용했다. (이 과정에서 심지어 최면술까지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65년 10월, 헨리 킨더가 사교 파티 중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그의 머리에 심각한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스스로 총을 쐈는지 버틀랜드에게 책임이 있는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충격을 입은 헨리 킨더는 엘렌이 준 독극물에 손을 댔고 그의 죽음은 끝내 자살로 판명됐다.

그의 사망 이후 버틀랜드와 엘렌은 자기들끼리 잘 먹고 살 사나 했으나 사람들의 보는 눈과 듣는 귀는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둘의 기괴한 관계를 알고 있던 또 다른 사람, 엘렌을 따라 시드니로 온 전 연인 프랜시스 잭슨이 버틀랜드에게 ‘살인’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내며 협박했다.

이를 포착한 경찰은 재조사 끝에 버틀랜드와 엘렌의 추악한 행각을 낱낱이 밝혔다. 결국 버틀랜드는 2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석방 후에는 영국으로 추방됐다.

출처 : 덴탈아리랑(http://www.dentalarirang.com)
기사 원문 : http://www.dentalarir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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